서울 B ℃ 좋음 경기 B ℃ 보통 인천 B ℃ 좋음 광주 B ℃ 보통 대전 B ℃ 보통 대구 B ℃ 보통 울산 B ℃ 좋음 부산 B ℃ 좋음 강원 B ℃ 좋음 충북 B ℃ 보통 충남 B ℃ 보통 전북 B ℃ 보통 전남 B ℃ 보통 경북 B ℃ 좋음 경남 B ℃ 보통 제주 B ℃ 보통 세종 B ℃ 보통
기사 (100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삼 불 망(三不忘) - [100] 삼 불 망(三不忘) - [100] 고난의 역사를 온 몸으로 헤쳐나간 충신을 기리며1910년 8월 29일로부터 35년간은 역사상 우리 민족이 가장 처절하게 존재 자체를 부정당했던 세월이었다. 서양 제국주의의 서세동점(西勢東漸) 움직임이 소용돌이치던 19세기 후반 조선은 개화를 통해 국제정세를 판단하고 제국(帝國)의 책략을 세우는데 미약하여 망국의 슬픔을 당하고 말았다.중국은 대한민국의 운명을 결정하는데 가장 크고 오래된 상시변수(常侍變數)이다. 멀리는 2천 1백년 전인 B.C. 108년 고조선 멸망 때부터 그랬고 가까이로는 임오군란과 6·25 때도 그랬다.그 중국이 삼 불 망(三不忘) - [99] 삼 불 망(三不忘) - [99] 해동의 명재상, 81세로 영면하다정미년(1367, 공민왕16) 7월 계묘일 아침.이제현은 감기는 눈을 힘없이 뜨며 아들, 딸, 사위, 자손들과 친척들의 면면을 살폈다. 그리고 큰 아들 서종의 손을 앙상한 손으로 잡았다. 이윽고 이제현은 눈을 감은 채 숨결을 가다듬고 천천히 입을 열기 시작하였다.“내 일찍이 조정에 출사해서 ‘널리 베풀어 뭇 사람을 구제한다(博施濟衆 박시제중)’는 뜻을 펴기 위해 동분서주했지만 마음만 바쁘게 보냈을 뿐 이뤄놓은 것이 없다. 내가 세상을 위해서 한 일 보다는 받은 것이 더 많구나. 이것은 다 내 덕이 부 삼 불 망(三不忘) - [98] 삼 불 망(三不忘) - [98] 7월로 접어들자 이제현은 병석에 누운 뒤 회복되지 않았다.육신은 끝 간 데 없이 오그라들기만 하였다. 아들, 손자, 제자들이 정성껏 탕재를 달여 올리며 간청하였다.“탕재를 드시고 기력을 회복하소서.”그러나 이제현은 이렇게 말하며 먹지 않았다.“나는 천명을 다했다. 대개 천하 만물로 생명이 있는 것은 죽지 않는 것은 없다. 인명은 하늘에 달려있고 육신은 순간이 지나면 사라지는 아침 이슬 같거늘……. 어찌 천도(天道)를 어길 것이랴.”무성한 정원의 나뭇가지가 바람에 서걱대며 소리 내어 울었다. 다른 해에 비해 혹독한 더위가 이제현의 노 삼 불 망(三不忘) - [97] 삼 불 망(三不忘) - [97] 귀양 간 최영 장군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어느새 4월이 되었다.정원의 담장마다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봄꽃들이 다 지고 송악산 기슭에서부터 송홧가루를 날리며 풋풋한 신록으로 물드는 초여름이 다가왔다. 온 세상의 만물들이 생기를 다시 찾고 있을 때, 이제현은 시름시름 자리에 눕게 되는 날이 잦아지고 있었다.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6월 어느 날. 이제현은 귀양가 있는 최영 장군이 불현듯 보고 싶어졌다. 그리하여 지필묵을 대령시켜 서찰을 써내려갔다. 몸의 기력은 쇠잔해지고 손끝의 힘은 빠져 흔들렸지만 정신만은 청아하게 맑아왔다. 최영 장군에 삼 불 망(三不忘) - [96] 삼 불 망(三不忘) - [96] 지장사 스님들과의 아쉬운 석별다음날 아침.고려 말에 큰 족적을 남긴 세 거목은 지장사 대문 앞에서 주지인 자혜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들과 처사들, 보살들의 배웅을 받으며 아쉬운 석별의 정을 나누고 있었다.이제현은 목이 메어 차마 떨어지지 않는 말을 시작했다.“그동안 이 못난 늙은이를 위해 여러 가지로 애써주고 도와주신 분들께 이렇다 할 보답도 못 해드리고 떠나게 되어 미안합니다. 이제 가면 언제 다시 지장사에 올 수 있으려나…….”자혜스님이 염주 구슬을 하나하나 짚으면서 대답했다.“시중 어르신, 사람이 만나면 언젠가 헤어지는 것처럼 삼 불 망(三不忘) - [95] 삼 불 망(三不忘) - [95] 지장사를 찾은 세 손님세월은 나는 화살처럼 빨리 지나갔다.동안거를 끝낸 지 달포가 지났을까. 추위가 아주 가신 것은 아니었으나 살에 닿는 바람에는 부드러운 기운이 완연하였다.‘우수(雨水)·경칩(驚蟄)이 지나고 춘분(春分)이 엊그제 같더니, 오늘이 벌써 청명(淸明) 이로구나……’방문을 열고 대웅전 앞마당을 향해 몸을 돌려 앉은 이제현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마침 봄의 전령사 매화와 영춘화는 이미 피었다 지고, 며칠 전 내린 봄비로 진달래와 개나리가 만개하고 나비떼처럼 낙화하는 산벚꽃들의 위용으로 봄의 서기가 완연하게 피어오르고 있었 삼 불 망(三不忘) - [94] 삼 불 망(三不忘) - [94] 계절은 어느덧 깊은 가을로 접어들었다.지장사를 오르는 계곡 산자락의 타오르는 단풍은 설악산 천불동의 그것 못지않았다. 온 산이 불타는 듯한 만산홍엽(滿山紅葉)의 장관이야말로 지금 이 순간을 치열하게 사는 생명의 절정이었다.만지면 묻어날 듯 파란 하늘을 응시하던 이제현의 마음도 불현듯 불타올랐다. 그는 머지않아 이 계곡이 흰 눈으로 뒤덮여 태고의 정적으로 되돌아갈 장관을 생각했다. 붉은색과 흰색, 그 원색의 조화가 그의 눈앞을 희롱했다.산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는데 철원의 밤은 유달리 빨리 찾아왔다. 고암산 너머로 해가 저물기 시작하 삼 불 망(三不忘) - [93] 삼 불 망(三不忘) - [93] 노동을 일상화하는 유유자적한 삶지장사에 다시 봄이 돌아 왔다.아기단풍나무와 갈참나무 숲속 사이에 꽃과 새 잎사귀가 연출하는 신록의 향연이 사찰 경내에 펼쳐지고 벌과 나비가 아름다운 윤무(輪舞)를 연출하고 있었다.이제현은 소평(召平, 진秦나라가 망한 뒤, 한나라에 출사하지 않은 선비)이 장안성 밖에서 오이를 심어 생계를 꾸려 나간 것처럼, 텃밭에 오이를 심고 가꾸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했다. ‘하루 일하지 않으면 하루 먹지 않는다(一日不作, 一日不食 일일부작 일일불식)’고 말한 당나라 백장회해(百丈懷海) 선승처럼 노동을 일상화하는 삶을 삼 불 망(三不忘) - [92] 삼 불 망(三不忘) - [92] 이제현은 옆에서 다소곳이 듣고 있는 정몽주를 향해 다시 말문을 열었다.“나의 부족한 학문은 목은을 통해 더 발전하고, 포은이 꽃피울 수 있을 거야. 목은도 자네를 ‘동방 이학(理學)의 시조’라고 하지 않았는가?”“받자옵기 민망한 말씀이시옵니다. 어르신…….”이제현은 비감한 어조로 두 제자에게 당부의 말을 잊지 않았다.“내 마지막으로 자네들에게 당부하네. 우리 성리학자들은 ‘유약하여 강직하지 못하고 당을 만들어 사정(私情)에 따른다’는 오명을 씻어내야 하네. 그리고 고려의 국운을 개척해나가는 선각자들로 거듭나야 할 것이야.”“스승님, 삼 불 망(三不忘) - [91] 삼 불 망(三不忘) - [91] 그해(공민왕15) 4월 중순. 어느 날 하루해가 기울기 시작하는 승석(僧夕) 무렵.명덕태후는 혜비전을 방문했다. 반갑게 맞이하는 혜비를 보자마자 명덕태후는 며느리의 손을 잡으며 서러움에 복받치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혜비도 가늠할 수 없는 한숨만을 쏟아놓고 있었다.두 여인은 이제현의 수난과 최영·이존오가 귀양 가게 된 것을 함께 가슴아파하며 공민왕의 변덕과 광포함을 막을 방도가 없음을 한탄했다.“대비마마…….”“아무도 모르리라고 생각하지 마세요. 먼저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혜비가 알고 나 또한 알고 있는 일이 아닙니까……. 삼 불 망(三不忘) - [90] 삼 불 망(三不忘) - [90] 이처럼 신돈의 하수인은 이제현과 최영을 배후로 지목하여 자백하라고 윽박질렀지만 이존오는 끝까지 거부했다. 이존오의 국문을 지켜보고 있는 이색의 마음은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만 같았다. 한동안 시간이 지난 후 이색은 이춘부와 김란을 설득했다.“고려는 태조 이래 간관을 죽인 일이 없습니다. 나아가 하찮은 유학자의 말이 대인(신돈)에게 무슨 큰 흠이 되겠습니까?”“으음, 알겠소.”이춘부와 김란은 이존오의 배후를 밝히는 것을 포기하고 매질을 중단시켰다. 마침내 이존오는 이색의 옹호로 극형을 면하고 고창감무로 좌천되었고, 정추도 동래현령으로 삼 불 망(三不忘) - [89] 삼 불 망(三不忘) - [89] 1366년(공민왕15) 4월초.최영 장군이 귀양을 간 지 일 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국권을 한 손에 휘어잡은 신돈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었으나, 조정대신 모두가 그 위세에 눌려 감히 탄핵을 하지 못하고 있을 때였다. 임금보다 더 큰 권력을 쥐고 있는 신돈의 잘못을 간한다는 것은 목숨을 내놓지 않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이때 우정언 이존오(李存吾)는 약관 26세였다. 그는 58년 전 충선왕이 복위한 해(1308)에 우탁이 지부상소를 올린 것을 떠올렸다. 그는 ‘나라가 어지러운데 침묵하는 건 참선비가 아니다’라고 결심했다. 그리하여 좌사의 삼 불 망(三不忘) - [88] 삼 불 망(三不忘) - [88] 노국공주가 죽고 난 후 1년 후의 일이다.1366년(공민왕15) 정월 초. 공민왕은 친히 공주 혼전(魂殿)에 제사를 지냈다. 기악의 연주가 극히 유쾌하여 노국공주가 마치 살아 있을 때와 같았다. 덕녕공주와 신돈이 이 연회에 참가하였으며 밤중에야 헤어졌다. 그러나 공민왕은 공주 혼전을 떠나지 않고 자기 손으로 공주의 화상을 그렸다. 노국공주는 비단에 그려져 다시 살아났다.공주, 그 동안 어떻게 지냈었소.꽃피고 새우는 봄이 돌아왔어요.송악산의 초목은 저렇게 푸르게 물들고공주가 거닐던 정원의 벚꽃은 아름답게 피어나는데…….공주는 나를 두 삼 불 망(三不忘) - [87] 삼 불 망(三不忘) - [87] 최영의 삭탈관직과 전민변정도감의 설치그해 5월 을축일.공민왕은 신돈을 왕사로 삼고 정계개편을 단행했다. 신돈의 측근인 김보(金普)와 이춘부(李春富)를 도첨의찬성사로, 임군보(任君輔)·김란(金蘭)·박희(朴羲)를 밀직부사로 봉하였다.찬성사 최영을 계림윤으로 좌천시켰으며, 염제신 등의 권신, 경복흥, 이인복(李仁復), 이구수(李龜壽)를 비롯한 문신들을 줄줄이 숙청했다. 또한 공민왕의 측근인 찬성사 유숙, 홍건적 2차 침입에서 큰 공을 세운 평리 한방신을 2선으로 퇴진시켰다. 신돈이 영도첨의사사(領都僉議使司)가 된 뒤 인사권을 포함한 강력 삼 불 망(三不忘) - [86] 삼 불 망(三不忘) - [86] 신돈이 왕의 신임을 얻었으니 더 욕심을 부리지 말아야 했다. 그러나 요승의 욕망은 또 다른 야심을 낳아 끝내는 비극을 부른다. 신돈이 왕의 총애를 등에 업고 국정을 농단하니 민심은 흉흉해지고 국정은 난맥상을 보여 고려는 종말을 재촉하고 있었다.1363년(공민왕12)에 일어난 ‘흥왕사의 변’으로 인하여 공민왕 측근 세력들 중 다수가 희생되었다. 정세운, 홍언박, 김용 등이 모두 제거됨으로써 왕을 뒷받침해 오던 측근 세력은 붕괴되었다. 그 대신 홍건적의 고려 침공을 계기로 신진 무장세력들이 주요 정치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을사년(13 삼 불 망(三不忘) - [85] 삼 불 망(三不忘) - [85] 공민왕과 노국공주의 사랑공민왕은 두 얼굴을 가진 군왕이었다.그는 성품이 신중하지만 잔인할 만큼 냉혹한 권력자였다. 또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는 충신을 배역(背逆)으로 몰아 죽이며, 잠재적 경쟁자들을 가차 없이 제거한 가혹한 군주였다.《고려사》에는 공민왕의 성격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왕의 천성은 의심이 많고 잔인해서 비록 심복 대신이라도 그의 권세가 성해지면 꺼리어 죽였다.격변기의 개혁을 이끄는 권력자라면 필연적으로 마키아벨리적인 속성을 띠기 마련이다. 개혁군주 공민왕의 숙명이 그것이었다. 그처럼 의심이 많고 잔혹한 공민왕에게는 삼 불 망(三不忘) - [84] 삼 불 망(三不忘) - [84] 노국공주의 죽음, 신돈의 등장과 망동이야기는 다시 거슬러 올라간다.안방의 다락문에는 네 폭의 화조도(花鳥圖)가 장식되어 있었다. 이 다락문을 등지고 그 앞에 사방침(四方枕)이 하나 놓인 보료 위에 한 요염한 계집이 앉아서 바느질을 하고 있었다. 이때 험상궂은 사내가 안방 문을 열어 제치고 들어섰다. 성급한 사내는 계집 옆으로 가서 계집을 번쩍 안아 보료 위에 쓰러뜨렸다. 그리고 재빠른 손놀림으로 계집의 저고리 옷고름을 풀고 옷깃을 헤쳤다.터진 앞섶으로 백설 같은 속살과 탐스러운 젖무덤이 드러났다. 탄력 있고 요염한 가슴은 부끄러워하 삼 불 망(三不忘) - [83] 삼 불 망(三不忘) - [83] 최유 장군님께.도지휘사 안우경 글월 올립니다. 지금 고려의 뜻있는 신하들과 백성들은 원 황제의 공민왕 폐위 결정에 쌍수를 들고 환영을 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다 최유 장군님이 고려의 신민을 아끼는 충정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지난 전투에서 소극적으로 임해 안주로 퇴각한 소장의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책임론이 나오고 있습니다. 총지휘관이 된 최영은 군율을 세우기 위해 소장을 희생양으로 삼으려는 음모를 세우고 있습니다. 소장에게 삼일 간의 말미만 주신다면 소장을 따르는 수하들을 규합하여 최영의 목을 수습 삼 불 망(三不忘) - [82] 삼 불 망(三不忘) - [82] 고려 조정은 이제현의 원모심려를 그대로 실행에 옮겼다. 두 차례에 걸쳐 사절단을 급히 원나라로 보내기로 결정했다. 12월 20일. 사절단 일원으로 뽑힌 이공수(李公遂)가 출국 인사차 이제현의 집을 찾아 앞날을 걱정하는 이야기를 했다.“어르신, 연경에 있는 고려인들은 공민왕에게 붙어야 할지 덕흥군에게 붙어야 할지 고민하고 있사옵니다.”“그럴테지.”“그들은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했는데, 원나라가 아무리 망조가 들고 공민왕이 아무리 날고 기어도 순제가 임명한 덕흥군이 결국 고려왕에 등극할 것’이라는 대세를 따르게 될 것이옵니다. 삼 불 망(三不忘) - [81] 삼 불 망(三不忘) - [81] 내가 오래 살다 보니 못 볼 것을 다 보는구나. 홍 시중은 10년 전 나를 도와 동지공거를 맡아 자네를 포함한 33인을 뽑지 않았던가……. 그는 저녁마다 목욕을 하고 의관을 갖추어 북두칠성에 절하였는데, 비록 조빙(朝聘, 신하가 조정에 나가 임금을 만나는 것과 나라와 나라 사이에 서로 사신을 보내는 일)이나 행역(行役, 공무로 먼 곳에 나아감)이 위급할 때라도 일찍이 그만두지 않았으며, 홍건적의 침입에 몽진하자는 여러 중신들의 의견에 반대하여 개경을 사수할 것을 주장했던 강단 있는 인물이었는데…….11월 초순. 개경 환도 후에 공민 처음처음12345다음다음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