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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100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삼 불 망(三不忘) - [63] 삼 불 망(三不忘) - [63] 어디선가 홍건적들을 뒤로 물리는 명령이 떨어지자 적들은 일제히 물러섰다. 최영은 여러 차례 적의 창에 찔려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었지만 맹수처럼 포효하며 용전분투(勇戰奮鬪)했다. 그리하여 적들을 모두 퇴각시킬 수 있었다. 회안성 전투에서 최영의 몸을 아끼지 않는 저돌성과 용맹은 적을 두려움에 떨게 했다. 27차에 걸친 반란군 토벌전에서 고려종정군은 이권(李權), 최원(崔源) 등 여섯 장수가 전사하였지만, 적의 대다수를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 전투를 끝으로 고려군은 그해(1355년) 5월에 원나라에서 돌아왔다. 열을 지어 귀국하는 삼 불 망(三不忘) - [62] 삼 불 망(三不忘) - [62] 이처럼 조정회의는 좀처럼 결론을 내지 못하고 있었다. 파병파와 파병반대파로 나눠진 조정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갑론을박(甲論乙駁)만 계속할 뿐이었다. 아침에 시작된 회의가 땅거미 질 때까지 끝나지 않았다.마침내 밀직제학 안보(安輔)가 지루한 조정회의에 종지부를 찍는 말을 했다.“전하, 파병은 고려의 국운이 걸린 중차대한 일이옵니다.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서 급하게 결정지을 사안이 아니라 익재 대감 같은 경륜 있는 원훈(元勳)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신중하게 결정하시는 게 좋을 줄 아옵니다.”좌중은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모든 중 삼 불 망(三不忘) - [61] 삼 불 망(三不忘) - [61] 하지만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묘두현령(猫頭縣鈴, 고양이 목에 방울 달기)을 어떻게 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권문세족과 부원배들의 저항을 뚫고 어떻게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느냐였다. 이제현은 실력이 없는 세도가 자제들이 등과할 수 없도록 엄격한 과거 심사기준을 확립했다. 이를 위해 그는 인재를 3단계로 나눴다.첫째는, 학문이나 문장에도 능하고 관리로서의 재능도 뛰어난 자(能文能吏 능문능리). 둘째는, 학문이나 문장에는 능하지만 실무 능력이 떨어지는 자(文而不能吏 문이부능리). 셋째는, 실무에는 능하나 학문 혹은 문장이 뒤떨어지는 자(吏而 삼 불 망(三不忘) - [60] 삼 불 망(三不忘) - [60] 조일신의 난은 6일 만에 평정되고 조일신의 한 달 천하는 막을 내렸다. ‘난이 평정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도성의 온 백성들은 만세를 불렀다. 하늘도 이에 화답했다. 연일 흙이 비 오듯 내리는 토우(土雨)가 자욱하게 끼었으나 조일신을 베고 나니 하늘이 맑게 개었다. 두 번째 우정승으로 조정에 복귀하다그해(1352년) 10월 7일. 공민왕은 조일신을 제거하는 데 성공한 후 마침내 왕권을 회복했다. 그리하여 명실공히 개혁정권을 수립하였다. 공민왕은 이제현을 우정승, 조익청(曺益淸)을 좌정승, 유탁(柳濯)을 판삼사사, 홍언박(洪彦博)을 찬 삼 불 망(三不忘) - [59] 삼 불 망(三不忘) - [59] 8월 중순. 공민왕은 노국공주와 함께 봉은사로 가서 태조 왕건의 진영(眞影, 얼굴을 나타낸 그림)을 알현하였는데, 두 사람이 기도를 드리려고 하자 일진 회오리바람이 불어와 제단 위의 촛불이 그만 꺼지고 말았다. 괴이한 일이었다. 공민왕은 봉은사에서 돌아오면서 내내 불길한 상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불길한 일이로다. 무슨 변고가 생길 줄 모르니 대비하라고 태조 대왕님이 내게 신호를 보낸 것일까…….’한편, 조일신의 난은 점점 구체화되고 있었다. 최화상(崔和尙)이 공민왕의 친정체제 구축에 분기탱천하여 조일신에게 거사를 앞당길 것을 부 삼 불 망(三不忘) - [58] 삼 불 망(三不忘) - [58] 예식이 끝나자, 공민왕이 강사포(綱紗袍, 왕이 신하들에게 하례 받을 때 입는 붉은빛의 예복)로 갈아입고 가마에 올라 본궐로 돌아오니 승평문에서 남아 기다리고 있던 백관들은 마중 나와 두 번 절하고 왕을 맞아들였다. 이로써 기나긴 하루의 제례는 끝났다.이윽고 공민왕은 어전회의에서 몽골인의 풍습인 변발을 풀었다. 충렬왕 4년(1277) 개체령을 발표하여 나라 전체에서 시행하도록 했던 변발을 75년 만에 공민왕이 먼저 푼 것이다. 이 소식이 조야에 전해지자 온 백성이 모두 크게 놀라 환호작약했다.“공민왕이 호복(胡服)을 입고 변발을 하는 삼 불 망(三不忘) - [57] 삼 불 망(三不忘) - [57] 공민왕에게 이제현은 왕도(王道)를 가르쳐 주는 스승이었다. 공민왕은 이제현으로부터 시국방략에 관한 현하지변(懸河之辯)을 듣고 나니 자신의 머리를 어지럽히던 먹구름이 개이고 찬란하게 빛나는 파란 하늘이 다가오고 있음을 느꼈다. 그는 가슴이 후련해지는 상쾌감을 폐부 깊숙이 느끼며 마음속으로 몇 번이고 다짐했다.‘나는 먼저 부정부패를 일소하고 산업을 장려하여 국력을 키워 백여 년간 지속된 원나라 식민지의 치욕을 씻을 것이다. 부국강병을 바탕으로 자주국의 독립성을 되찾고 잃어버린 고구려의 옛 강토를 회복하여 찬란한 영광을 재현할 것이다.’ 삼 불 망(三不忘) - [56] 삼 불 망(三不忘) - [56] 공민왕과 이제현의 치국방략을 위한 담론즉위식에 이어 온 나라 안이 축제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경축잔치가 끝나고 며칠이 지난 후 이제현은 공민왕의 부름을 받았다. 이제현은 다소 긴장된 심정으로 편전으로 들어섰다. 큰 포부와 야심을 가진 22세의 젊은 국왕과 학자로서 명망이 높은 65세의 경륜 높은 재상이 정치개혁을 위해 머리를 맞댄 것이다. 편전에는 뜻밖에도 중전인 노국공주가 동석해 있었다. 이제현은 두 사람을 향해 곡배(曲拜 굽은 절)를 올리고 정중히 고했다. “전하, 찾아계시옵니까?”“오늘은 기쁜 날이라 노국공주를 불렀어요.”“ 삼 불 망(三不忘) - [55] 삼 불 망(三不忘) - [55] 찬성사 조일신이 비목을 가지고 원나라에서 돌아오자 이제현은 머뭇거리거나 눈치를 보지 않고 과감하게 조정 인사를 단행했다. 이몽가(李蒙歌)가 판삼사사에, 조익청(曹益淸)과 전윤장(全允臧)이 찬성사에, 조일신과 조유(趙瑜)가 참리에, 이공수(李公遂)가 정당문학에, 이연종(李衍宗)이 밀직사 겸 감찰대부에, 윤택(尹澤)이 밀직제학에, 이승로(李承老)가 지밀직사사에, 백문보(白文寶)가 전리판서에, 최영(崔瑩)이 도부장군에 제수되었다. 이제현이 약관 35세의 최영을 수도 경비군의 책임자인 도부장군으로 발탁한 이유는 그가 어지러운 국내외 상황 삼 불 망(三不忘) - [54] 삼 불 망(三不忘) - [54] 그해(1351년) 섣달 초하룻날. 이제현은 가까운 조정 관료들을 집으로 초대했다. 이승로(李承老), 윤택(尹澤), 이공수(李公遂), 백문보(白文寶), 최영(崔瑩)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세칭 이제현의 문생들이라고 할 수 있는 면면들이었다. 음식 장만이나 손님맞이에 여념이 없는 가족들은 분주했지만 즐거운 표정이 역력했다. 때맞추어 셋째 부인 서씨가 소담스런 주안상을 들고 들어왔다. 도첨의정승으로 국정을 총괄하는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의 자리에 오른 이제현의 목소리에는 천근보다 무거운 위엄이 담겨있었다.“오늘 나와 함께 삼 불 망(三不忘) - [53] 삼 불 망(三不忘) - [53] 황제 폐하께. 충정왕이 나이가 어린 탓으로 정치가 안정되지 못하고 사회가 혼란스러워 국정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저희 동방의 소국은 지금 누란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고려의 남쪽 해안 지방이 왜구들에게 유린당해도 조정에서는 속수무책입니다. 이러한 혼란을 막기 위해서는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임금을 정해줘야 합니다. 번국(蕃國)이 성해야 상국(上國)이 흥한다 했습니다. 황은(皇恩)을 내려 주시옵소서.원나라 조정은 어전회의를 열어 이들의 청원을 논의했다.원나라 순제는 중신들에게 물었다.“어찌하여 고려의 신하들이 자신들의 왕을 폐위시키려 삼 불 망(三不忘) - [52] 삼 불 망(三不忘) - [52] 해가 바뀐 1350년(충정왕2) 8월. 130여 척의 왜구가 자연도(紫燕島, 인천)와 남양 등지를 침입하여 민가를 불사르고 백성들을 잡아갔다. 남해안은 왜구와의 전쟁터로 돌변했다. 1345년 남해안을 처음으로 침략한 왜구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고려를 침입하여 노략질과 방화를 일삼았던 것이다. 이처럼 고려의 백성들이 왜구들에 의해 유린당해도 고려 조정은 속수무책이었다. 관리들은 출전명령을 내려도 듣지 않았으며, 오히려 왜구를 피해 피난을 떠나는 실정이었다. 이런 누란(累卵)의 와중에도 덕녕공주는 정동행성을 기반으로, 희비 윤씨는 왕 삼 불 망(三不忘) - [51] 삼 불 망(三不忘) - [51] 이제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무언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무슨 일이라 하던가?”“갑자기 신열이 나서 거동하지 못한다 하옵니다.”두 사람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50년 이상 한 길을 걸어온 결발동문이 아니던가. 이제현은 예의 직감이 발동했다.“치암이 천수를 다 누리지 못하고 가는구나. 가정, 함께 함양부원군 댁으로 가세.”“예, 스승님.”이제현과 이곡을 태운 자비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박충좌의 집으로 곧장 향했다. 이제현은 평소 정승으로 있어도 거처와 의복이 검소질박하고 강직했던 박충 삼 불 망(三不忘) - [50] 삼 불 망(三不忘) - [50] 해월이는 사랑하는 정인이 다시 환로에서 물러나 칩거한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려왔다. 그러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고려의 운명 아니던가. 잠시 서먹하던 분위기을 바꾸기 위해 해월이가 다시 말을 꺼냈다. “대감, 왕기 대군을 만나시면 절망에서 희망을 발견하는 의지를 가지시라고 용기를 북돋워 주세요. 대군께서 임금이 되려면 야심을 감추고 기황후와 손을 잡는 수밖에 없어요.”폐부를 깊숙이 찌르는 말이었다.“내 관장 말씀을 그대로 왕기 대군께 전하지.”이제현은 어느덧 경륜지사(經綸之士)가 되어 있는 해월이의 혜안에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 삼 불 망(三不忘) - [49] 삼 불 망(三不忘) - [49] 지루한 장맛비도 안축의 장례식에 때맞추어 그쳤다. 장례식이 끝나자 이제현은 수철동 서재에서 안축이 제 고향인 풍기 땅의 죽계(竹溪)와 순흥(順興)의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죽계별곡(竹溪別曲)≫을 읊조리며 고인을 추모했다.초산효와 소운영이라는 기녀들과 동산 후원에서 노닐던 좋은 시절에, 꽃은 난만하게 그대 위해 피어 버드나무 그늘진 골짜기에 우거졌는데, 홀로 난간에 기대어 다시 오실 님 기다리느라 급해진 마음은 새로 나온 꾀꼬리 울음소리에 깃들여 있네. 아! 한 떨기 꽃처럼 구름 같은 검은 머릿결 흘러내리고 또 흘러내리는데, 아름다 삼 불 망(三不忘) - [48] 삼 불 망(三不忘) - [48] 다음 날 이른 아침, 내시들은 비를 들고 새벽녘에 궁궐 안에 내린 눈을 쓸다가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아니, 이것이 무엇인가?”“감히, 누가 이걸 붙여 놓았지?”“이건 익명서가 아닌가?”“그래, 이건 대비마마를 지칭하는 글이 틀림없어.”“말세야, 말세!”“목이 두 개가 아니라면 말조심하게, 누가 들으면 어떻게 하려고.”덕녕공주와 강윤충 사이의 음란한 관계를 고발하는 익명서였다. 이것은 연적(戀敵) 관계에 있던 배전이 자기 심복을 시켜 마치 개혁세력인 성리학자들이 방을 붙인 것처럼 위장한 것이다. 강윤충이 탄핵을 받게 되면 자신이 덕 삼 불 망(三不忘) - [47] 삼 불 망(三不忘) - [47] 이제현의 예감은 적중했다. 기삼만의 옥사에 권문세족들은 조직적으로 항거했다. 먼저 전 충주판관 최순보가 상소를 올렸다.“전하, 기삼만의 횡포가 다소 있었다손 치더라도 사망에 이르게 할 정도는 아니었사옵니다.” 찬성사 강윤충(康允忠)도 상소를 올려 옥사의 문제점을 적시했다. “전하, 정치도감은 개혁을 빌미로 무고한 사람을 죽이고 있으니 그 부작용을 바로잡아야 하옵니다. 뿐만 아니라 상국(원나라)에서 다시 왕후를 정치도감의 판사로 임명하여 정치도감을 재건하려 하고 있지만, 차제에 정치도감을 혁파해야 하옵니다.” 행성이문 배전(裴佺)도 삼 불 망(三不忘) - [46] 삼 불 망(三不忘) - [46] 그러나 작용이 크면 반작용이 필연적으로 따르는 법인가. 개혁이 진행될수록 충혜왕의 측근 인물들과 부원배 등 반개혁 세력이 결집했다. 개혁파와 반개혁파 간의 대결은 고려와 원나라를 오가면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그 결과 개혁파들이 주도했던 주요한 개혁정책은 온갖 부정을 저지르던 부원배들의 반대 때문에 중단되고 말았다.‘편년강목’을 안축, 이곡, 안진, 이인복 등과함께 증수하다그해 6월 말. 이제현은 우정승 왕후가 올 한 해를 넘기지 못하고 경질될 것이라고 예측했다. 왜냐하면 반대 세력들의 저항으로 개혁에도 속도조절이 필요하다는 것을 삼 불 망(三不忘) - [45] 삼 불 망(三不忘) - [45] 시경연(侍經筵)에 들어가 충목왕을 가르치다당시 선비로서의 최고 영예와 자랑은 시경연(侍經筵)에 들어가는 것이었다.1344년 6월. 이제현은 서연(書筵)을 설치하고 우정승 채하중, 좌정승 한종유, 찬성사 박충좌·김륜 등 당대의 거유(巨儒)들과 돌아가며 충목왕의 글공부를 시강(侍講)했다.충목왕은 아침에는 조강, 낮에는 주강, 그리고 저녁에는 석강에 나갔다. 여간 부지런하지 않고는 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철부지 어린 나이었지만 충목왕은 타고난 성품이 남달리 학문을 숭상했다. 충목왕은 여러 명의 경연관(經筵官) 중에서 유독 이제현을 기 삼 불 망(三不忘)-[44] 삼 불 망(三不忘)-[44] 술이 몇 순배 돌자 모두는 취기가 오를 정도로 오르자, 거나해진 박충좌가 정색을 하고 조정의 일을 화두로 끄집어냈다.“익재, 8살밖에 안 된 금상을 대리하여 덕녕공주가 섭정을 하고 있네. 덕녕공주에게 나이 어린 임금을 빌려준 꼴일세. 공주는 왕의 어머니이지만 몽골 여자가 아닌가? 고려와 원나라의 이익이 충돌할 때 공주가 과연 어떤 선택과 결정을 하겠는가? 종사의 앞날이 심히 걱정되네.”연신 술잔만 비우고 있던 이제현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지난 7년간 왕 노릇을 한 충혜왕은 희대의 패륜아로 고려 역사상 가장 못난 군주가 되고 말았네 처음처음이전이전12345다음다음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