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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100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삼 불 망(三不忘) - [43] 삼 불 망(三不忘) - [43] 정계복귀, 개혁의 선두에 서다충혜왕의 큰 아들인 8세의 어린 세자 왕흔(王昕)은 부왕이 폐위되었을 때 볼모로 원나라에 머물고 있었다. 왕흔의 몽골 이름은 팔사마타아지(八思麻朶兒只)로 총명하고 사리에 밝았다. 아버지가 폐정을 저지르고 귀양 도중 독살된 것을 나중에 알게 된 왕흔은 부왕의 갑작스런 죽음을 천명으로 받아들이고 하늘이 무너지는 천붕(天崩)의 슬픔을 이겨낼 수 있었다.원나라 조정은 충혜왕을 독살하면서 일말의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것일까. 충혜왕에게 마지막까지 충성한 이조년(李兆年)과 한종유(韓宗愈) 중 이조년이 별세하자 원자 삼 불 망(三不忘) - [42] 삼 불 망(三不忘) - [42] 충혜왕의 소환과 죽음한편, 원나라에 소환되어 옥고를 치루는 등 고려 국왕으로써 씻을 수 없는 수모를 당한 충혜왕은 개전의 정을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사무역(私貿易)으로 재화를 모으고 무리한 세금을 강제로 징수해 유흥에 탕진하고, 백성들의 토지와 노비를 약탈해 보흥고(寶興庫)에 소속시키며, ‘일백 처녀 회춘론(백일 동안 어린 숫처녀와 잠자리를 하면 만수무강할 수 있다는 주장)’을 받아들여 환락의 밤에 빠져드는 등 실정(失政)을 계속 자행했다.이조년이 타계한 그 해 10월. 송악산을 만산홍엽(滿山紅葉)으로 붉게 물들였던 단풍은 삼 불 망(三不忘) - [41] 삼 불 망(三不忘) - [41] 이처럼 전설이 된 기황후는 베갯머리송사로 원나라 황제를 주물렀다. 그녀의 말 한마디면 기황후의 문중은 물론 사돈의 팔촌까지 벼슬이 넝쿨째로 굴러 들어왔다. 그 갑작스런 벼슬은 요술방망이가 되어 황금과 문전옥답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세상의 민심은 세(勢)를 따르기 마련인 법이다. 기철을 중심으로 한 기당(奇黨)을 향하여 권력은 빠르게 움직였다.때마침 연경에서 강릉대군 왕기(王祺, 나중의 공민왕)를 측근에서 보좌하고 있던 이연종이 귀국하자마자 이제현의 집을 찾았다. 이연종은 이제현에게 원나라 조정과 연경의 사정을 소상하게 설명했다. 삼 불 망(三不忘) - [40] 삼 불 망(三不忘) - [40] 다음 해인 1340년(충혜왕 복위1) 1월.충혜왕은 원나라에 잡혀간 후 형부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고려 조정은 비상이 걸렸다. 결국 조정의 재상·원로들이 충혜왕의 죄를 용서해 주도록 청원할 조정의 대표로 재야의 거유(巨儒)인 이제현을 천거했다.이어서 조정 각 부서에서는 원나라에 파견되는 사신에게 주어 보낼 물품과 원나라 형부 관리들에게 바칠 뇌물을 마련하느라 법석을 떨었다.전법판서 안축이 조정의 뜻을 전하러 이제현의 수철동 집을 찾아와 말했다.“조정에서는 충혜왕의 방면(放免)을 상주할 대표로 익재를 천거했네.”“강태공처럼 세월만 삼 불 망(三不忘) - [39] 삼 불 망(三不忘) - [39] 시 암송이 끝나자 최해가 기다렸다는 듯 품평을 시작했다.“눈과 소나무가 한데 어우러진 새벽 산사의 풍경은 청정하고 깊은 익재의 정신적 수준을 드러냄과 동시에 지향점으로 해석되네. 익재의 반평생 시법이 이 시에 다 나타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세.”“원나라 제과에 합격하여 그 필명(筆名)을 중원에 떨친 대문호의 칭송을 받고 나니 내 몸 둘 바를 모르겠네.”점심 무렵에 만난 두 사람은 적조하여 만나지 못했던 회포를 푸느라고 석양에 해가 지는 줄도 몰랐다. 아쉬운 작별과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고 돌아서는 이제현의 발걸음은 어느 때보다 가벼 삼 불 망(三不忘) - [38] 삼 불 망(三不忘) - [38] 공녀문제 해결을 위한 이곡과의 대화1335년(충숙왕 복위4) 겨울.이제현의 수철동 사랑방에는 고려인들로 하여금 언제나 눈물을 자아내게 하는 공녀 문제의 해결을 위해 이제현, 이곡 두 사제(師弟)가 서안(書案)을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아 있었다.이때 이곡은 한 해 전에 ‘학교를 진흥시키라’는 조서를 받고 원나라에서 귀국하여 직보문각(直寶文閣) 벼슬을 맡고 있었다.스승인 이제현이 먼저 말문을 열었다.“가정(稼亭), 자네는 명년에 다시 원나라에 들어간다지?”“예, 스승님. 2년 후 다시 원나라 조정에 출사하는 조건으로 작년에 귀국했기 때문 삼 불 망(三不忘) - [37] 삼 불 망(三不忘) - [37] 사랑하는 권씨 부인과의 사별1333년(충숙왕 복위2) 2월 하순.이제현이 관직에서 물러나 산림처사로 지낸 지 3년이 흘렀을 때다. 권씨 부인이 지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사랑하는 남편의 지극정성 간호도 소용없었다. 이제현은 부인상을 치른 뒤 식음을 전폐하고 몸져 누워 있었다.30년을 함께 살며 사랑한 부인과의 정을 잊지 못해서일까. 아니면 50도 안 되는 아까운 나이에 세상을 버린 영혼이 가엾어서일까. 이제현은 너무나 애통한 나머지 며느리들의 수심 어린 수발조차 뒤로하여 몸은 삭정이처럼 말라가고 있었다.그해 3월 하순이 되어 봄기운이 삼 불 망(三不忘) - [36] 삼 불 망(三不忘) - [36] 1330년(충숙왕17) 4월 어느 날. 날씨는 더할 나위 없이 화창했으나, 이제현의 마음속은 겨울날의 시린 혹독함으로 어지러웠다. 이제현은 마침내 입궁(入宮)하였다. 충혜왕은 이 날도 후궁들을 좌우에 끼고 않아, 아침부터 풍악을 울리며 주연을 즐기고 있었다. 그는 중신이 들어와도 궁녀들과 희롱만 계속할 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이제현은 침통한 표정으로 술상 앞에 꿇어앉아 충혜왕에게 간언을 올렸다. 22년 전 감찰규정 우탁이 충선왕에게 지부상소(持斧上疏)를 올린 그 심정으로.신, 이제현 삼가 아뢰옵니다. 신이 듣자옵건대 ‘사치는 천화 삼 불 망(三不忘) - [35] 삼 불 망(三不忘) - [35] 태정제는 충선왕에게 다시 고려 국왕으로 즉위할 것을 권유하였다. 그러나 무슨 이유인지 충선왕은 굳이 이를 사양하고 연경의 만권당에서 여생을 보내기로 결심하였다. ‘월조는 남쪽 가지에 집을 짓고(越鳥巢南枝 월조소남지), 호마는 북풍에 운다(胡馬嘶北風 호마시북풍)’는 말이 있으니, 충선왕인들 어찌 고국이 그립지 아니하였겠는가. 다만 권력의 무상(無常)을 절실히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1325년(충숙왕12) 5월 23일. 유배생활의 후유증이 깊어서 일까. 충선왕은 연경에 도착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만권당 저택에서 붕어(崩御)했다. 향년 5 삼 불 망(三不忘) - [34] 삼 불 망(三不忘) - [34] 옆에 있던 해월이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대감, 무슨 꿈을 꾸셨어요?”“허허, 깜빡 잠이 들었나 보구려. 꿈속에 서희 대감이 나타나서…….”“서희 대감께서 뭐라고 하셨는데요?”“고려의 존망이 달린 입성책동을 꼭 저지하라는 말씀이 있었다네.”마침내 해월이가 지필묵을 준비해주자, 이제현은 붓 끝에 먹을 듬뿍 찍어 일필휘지(一筆揮之)로 상소문을 써내려갔다. 장원급제한 문장이 아니던가. 그 붓 끝에 막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용사비등(龍蛇飛騰)하고 평사낙안(平沙落雁)이라. 이제현은 이백(李白)과 왕희지(王羲之)를 능가할 정도의 문사와 삼 불 망(三不忘) - [33] 삼 불 망(三不忘) - [33] 이래저래 방신우를 설득할 묘안을 떠올리고 있던 어느 날, 이제현은 해월이가 선물로 장만해 준 질 좋은 보이차를 들고 방신우의 집을 찾았다.방신우는 이제현을 방안으로 맞아들인 후 나지막한 목소리로 물었다.“익재 공께서는 무슨 일로 이 누옥(陋屋)을 다 찾아 주셨습니까?”“평장정사님께 도움을 청할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저 같은 사람에게 무슨 부탁의 말씀이?”“유청신과 오잠의 입성책동 주장이 원 조정에서 점점 공론화되고 있다고 합니다. 유청신은 충숙왕이 정사를 제대로 돌보지 못한다고 무고를 한 간신배이며, 오잠은 항상 충렬 삼 불 망(三不忘) - [32] 삼 불 망(三不忘) - [32] 충선왕의 복권, 충숙왕의 왕위 회복1323년(충숙왕10) 9월.이제현이 타사마에서 충선왕을 모시고 있던 즈음이었다. 이제현의 정세에 대한 예측은 예리하고도 정확했다. 원나라 조정에서 정변이 일어나 영종(英宗)이 21세의 젊은 나이에 암살당하고 태정제(泰定帝)가 제6대 황제로 즉위하였다.태정제는 쿠빌라이의 손자이며 충선왕의 처남이었다. 태정제가 즉위하자 충선왕은 마침내 복권되었고, 충숙왕도 다시 왕위를 회복했다.마침내 충선왕은 3년 2개월의 유배생활(타사마에서의 7개월 포함)에서 풀려나와 연경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충선왕은 예전의 권 삼 불 망(三不忘) - [31] 삼 불 망(三不忘) - [31] 충선왕을 만나러 감숙성 타사마까지 가다그해(1323년) 2월 말일. 마침내 이제현의 노력이 결실을 보게 되어 원나라 황제가 교지를 내렸다.‘충선왕을 감숙성의 타사마(朶思麻)로 양이(量移, 먼 지방에 좌천하였던 관리를 대사령으로 인하여 근처로 옮기는 것)하라.’이제현은 뛸 듯이 기뻤다. 그는 먼 길을 마다 않고 단신으로 감숙성 타사마까지 가기로 결심했다. 그 여행은 매우 험난한 길이었다. 때문에 만권당에서 함께 학문을 연구하던 많은 중국학자들이 이제현의 장도(壯途)를 걱정해 줬다.4월 20일. 이제현은 행장(行狀)을 꾸렸다. 그리고 삼 불 망(三不忘) - [30] 삼 불 망(三不忘) - [30] 이 같은 상소를 받은 원 태정제(泰定帝)는 진상을 확인토록 하였으나, 사필귀정(事必歸正), 유청신과 오잠의 참소문은 거짓이라는 것이 밝혀졌다.입성책동(立省策動)을 꺾어고려 사직을 구하다공자는 3년상이 천하의 통상(通喪)이라 했다.통상이란 위로 천자로부터 아래로 백성에 이르기까지 상하의 모든 계층에 두루 통하는 상례라는 뜻이다. 공자는 자식이 부모를 위해 3년상을 치르는 것은 부모의 삼년지애(三年之愛, 부모가 생후 3년간 젖먹이고 길러준 사랑)에 대한 보은(報恩)의 의미가 있다고 했다.고려 말 당시는 상제(喪祭)가 문란해져 사대부들 삼 불 망(三不忘) - [29] 삼 불 망(三不忘) - [29] 1321년(충숙왕8) 4월. 부전자전이라 할까. 충숙왕도 아버지 충선왕의 전철을 밟게 되었다. 그는 국왕인(國王印)을 빼앗기고 원나라로 소환되었다. 충숙왕은 원나라에서 절치부심하며 3년을 보내게 된다.충숙왕의 원나라 소환으로 고려는 사실상 국왕 궐위상태가 되었다. 상왕인 충선왕은 이미 1년 전부터 티베트에 유배되어 국왕으로 복귀할 처지가 못 되었다. 결국 왕고가 국왕의 권한을 대신하였다. 이로써 고려에서는 충숙왕과 심양왕 왕고를 지지하는 세력 사이에 대립이 계속되었다.한편, 정의감이 남달리 강한 최해는 요양로 개주판관에 부임한 지 삼 불 망(三不忘)- [28] 삼 불 망(三不忘)- [28] 이제현이 지공거로 임명된 뒤 실시된 이 과거에서 이곡(李穀), 안보(安輔), 백문보(白文寶), 윤택(尹澤) 등의 성리학자들이 급제했다. 충렬왕~충정왕 시기에 과거 급제자의 평균 연령이 21.5세였다. 따라서 좌주인 이제현과 그의 문생들과는 나이 차이는 평균 13세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이 점은 뒷날 이제현을 중심으로 하는 정치세력이 좌주·문생 관계를 통해 형성되고 장기간 유지되는 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과거가 끝난 후 이제현은 아버지(이진)의 희수(喜壽)를 축하하는 잔치를 베풀었다. 이진과 부인이 앉은 앞과 등받이에는 홍도화( 삼 불 망(三不忘) - [27] 삼 불 망(三不忘) - [27] 경신년(1320, 충숙왕7) 5월 5일. 단옷날이 돌아왔다. 원나라 연경에서는 연꽃이나 대나무 잎에 싼 찹쌀밥 쭝쯔(子)를 먹으며, 굴원을 배로 구한다는 뜻에서 용선(龍船) 경기를 하며 부산을 떨었지만, 주인을 잃어버린 만권당에는 절간 같은 정적만 감돌 뿐이었다. 이는 충선왕이 티베트로 유배당한 뒤부터 나타난 현상이었다.만권당은 점점 쇠락해져 갔다. 정원의 꽃들은 시름시름 시들어 버렸고, 어은에 피어난 연꽃은 진흙에 더럽혀졌으며, 지붕의 기와는 키 큰 잡초로 무성해졌다.만권당의 설립 취지는 점점 퇴색해져 갔다. 원나라에 볼모로 와 삼 불 망(三不忘) - [26] 삼 불 망(三不忘) - [26] 이처럼 예기치 않았던 강남 여행은 이제현과 해월이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며칠 후, 이제현과 해월이는 충선왕의 주관 하에 평생을 정인으로 살아갈 것을 맹세하는 단출한 의식을 갖고 신방을 차렸다. 부덕(婦德)이 남다른 권씨 부인은 충선왕의 제안에 기꺼이 동의를 해주고 두 사람의 신혼 초례를 정성스레 준비해주어 지아비 이제현의 마음을 가볍게 해주었다.마침내 첫날밤을 맞이했다. 어린 신부 해월이는 꽃다운 방년 18세였다. 그녀는 이슬 머금은 포도알 같은 새까만 눈동자를 반짝이면서 이제현에게로 다가갔다.“선생님, 저를 받아주셔서 고마워요. 삼 불 망(三不忘) - [25] 삼 불 망(三不忘) - [25] 소주에서 오왕 부차와 서시의 발자취를 그리다다음 날 아침.이제현 일행은 500년 전 제나라의 흥망을 지켜 본 당추에 제를 올린 후 고을 어귀까지 배웅 나온 촌장 이세웅 이하 촌민들과 아쉬운 작별을 고하였다. 배웅객들 중에는 이별을 아쉬워하는 해월이의 모습도 보였다.청주를 떠나 소주로 가는 도중 이제현은 역사를 더듬어 웅대한 고구려사를 반추하다가 영웅 이정기 장군이 환생하여 자신을 감싸고 동행하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나자 아득한 평원에 한 무리의 철기병 대열이 질풍신뢰(疾風迅雷, 사나운 바람과 빠른 번개) 같이 내달려오는 환청에 삼 불 망(三不忘) - [24] 삼 불 망(三不忘) - [24] 선두 호위병들은 크게 놀라 노인을 삽시간에 둘러쌌다.“저리 비키시오! 이 행차가 어떤 행차라고 감히 상왕 전하를 알현하겠다고 하시오!”호위병들은 우격다짐으로 노인을 몰아내려 했으나, 소신을 굽히지 않은 노인은 한사코 어떤 일이 있어도 충선왕을 알현해야만 하겠다는 것이었다.이제현은 말위에서 호위대장을 보고 물었다.“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저렇게들 소란스러운가?”호위대장이 다가와 대답하였다.“난데없는 노인이 행차 앞에 나타나 상왕 전하를 알현하겠다고 하여 소란스럽게 되었습니다.”“무슨 사연이 있는 모양인데, 내가 상왕 전하의 윤허를 얻을 처음처음이전이전12345다음다음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