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B ℃ 좋음 경기 B ℃ 보통 인천 B ℃ 좋음 광주 B ℃ 보통 대전 B ℃ 보통 대구 B ℃ 보통 울산 B ℃ 좋음 부산 B ℃ 좋음 강원 B ℃ 좋음 충북 B ℃ 보통 충남 B ℃ 보통 전북 B ℃ 보통 전남 B ℃ 보통 경북 B ℃ 좋음 경남 B ℃ 보통 제주 B ℃ 보통 세종 B ℃ 보통
기사 (100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삼 불 망(三不忘) - [23] 삼 불 망(三不忘) - [23] 이제현 일행은 성도 인근에 위치한 무후사(武候祠, 유비와 제갈량의 묘가 안치된 사당)를 찾았다. 사당 내에는 유비, 제갈량, 관우, 장비 등 당시의 장군과 정승들이 나무로 조각된 유리관 속에 의젓하게 앉아 있었다. 이제현은 한동안 무후사에서 뭇 영웅들의 발자취를 더듬어 본 후 객관으로 발길을 옮겼다.여름 해는 길게 늘어졌다. 한나절 동안 고적을 참배하며 힘든 줄 몰랐던 몸이 객관에 들 때쯤 이미 파김치가 되어 있었다. 이제현 일행은 사천의 유명한 마파두부 요리를 안주로 해서 대를 잘라 그 죽통 속에 술을 빚어 넣고 파초 잎으로 포장 삼 불 망(三不忘) - [22] 삼 불 망(三不忘) - [22] 학문을 연마하면서 봄날을 희롱하던 어느 날. 충선왕은 이제현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아미산(峨眉山, 사천성의 명산)에 봉명사신(奉命使臣)으로 다녀오라고 당부했다. “익재, 공은 아미산에서 행해지는 산신제에 원 황제의 특사 자격으로 치제(致祭, 임금이 제물과 제문을 보내어 제사 지내는 일)를 하고 돌아오게.”“상왕전하, 분부 잘 받들겠사옵니다.” “시문은 원나라 상류층의 중요한 교제의 수단이네.” “예, 그러하옵니다.”“과인은 원나라 문인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공의 여행 시들을 활용할 계획이네. 그러니 공은 여행 중 쓴 시를 인편을 통해 삼 불 망(三不忘) - [21] 삼 불 망(三不忘) - [21] 한편, 당시 고려나 남송(南宋)의 속사정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입장이었다. 고려는 자주권을 상실한 나라이고, 남송은 망국의 한을 품은 나라였기 때문이었다. 이 두 나라 지식인의 고뇌와 화두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지켜나갈 것인가 하는 점이었다. 몽골족이 무력으로 남송을 멸망시켰지만, 실상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남송의 한족이 주도권을 쥐고 있었다. 한족들은 저급한 문화를 가진 이민족의 지배로 인해 새로운 문화 창조보다 복고에 치중하게 되었다. 그 복고의 중심에 왕희지를 들고 나와 송설체를 완성시킨 조맹부(趙孟)가 있었다.조맹부는 호 삼 불 망(三不忘) - [20] 삼 불 망(三不忘) - [20] 살포시 감은 눈으로 왼손 손가락이 열두 줄 위에 가볍게 놓이고 가야금 열두 줄이 울리기 시작하자 방 안은 금세 물이 괸 연못처럼 잠잠해졌다. 이제현이 탄주하는 가락은 여러 마리의 물고기가 되어 물속을 헤엄치기 시작했다. 이윽고 이제현의 입에서는 구슬픈 노래 소리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북방에 아름다운 사람이 있는데, 세상에 견줄 만한 것 없이 홀로 서 있네. 한 번 돌아보면 성이 기울고, 두 번 돌아보면 나라도 기우네. 이제현은 나라를 기울일 만한 여자라는 뜻의 경국지색(傾國之色)을 노래했다. 왕위를 버리고 학문과 시화에 심취하여 일 삼 불 망(三不忘) - [19] 삼 불 망(三不忘) - [19] 당태종이 고구려를 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채 돌아오는 길이었다. 발착수(渤錯水)에 이르러 80리 진펄이 펼쳐지는 바람에 수레가 지나갈 수 없었다. 장손무기와 양사도 등이 1만 명의 군사들에게 나무와 풀을 베어 진흙길을 메우게 하고 물이 깊은 곳에서는 수레를 다리 삼아 건너게 했다. 황제가 직접 말채찍으로 나무를 묶어 이 일을 도왔다. 당태종은 원정이 성공하지 못했음을 깊이 뉘우치고 탄식하여 이르되 ‘위징(魏徵)이 만일 있었다면 나로 하여금 이 원정을 하게 하지는 않았을 것’ 이라고 말했다. 이제현은 당태종이 이처럼 험난한 길을 삼 불 망(三不忘) - [18] 삼 불 망(三不忘) - [18] 처음 떠나는 원나라 여행 이튿날 아침. 이제현은 창호(窓戶)로 쏟아져 내리는 눈부신 겨울 햇살을 느끼며 눈을 떴다. 태어나서 처음 떠나는 대륙 여행이었다. 간밤에 잠을 설친 그는 서둘러 행장을 꾸려 집을 나섰다. 부친 이진, 장인 권부를 비롯한 친척들은 선의문(宣義門)까지 따라 나와서 배웅하였다. 개경의 서대문은 선의문이다. 선의문을 나서면 개경을 완전히 벗어나는 것이다. 부친·모친, 장인·장모에게 큰절을 올리고 난 이제현은 장남 서종(瑞種)의 손을 잡고 권씨 부인은 강보에 싸인 차남 달존(達尊)을 포대기에 싸서 안고 언제 올지 기 삼 불 망(三不忘) - [17] 삼 불 망(三不忘) - [17] 2월 보름 연등회 행사차 충선왕이 봉은사에 가서 최감, 박전지, 오한경, 이진 등에게 상승국(尙乘局, 궁중의 수레나 말을 맡아보는 곳)의 안마(鞍馬, 안장 얹은 말)를 하사하였다. 이튿날 여러 신하가 헌수(獻壽)하였는데, 차례가 4학사에 이르자 왕이 “앞으로 가까이 오라” 하여 술을 따라 주면서 말하기를 “여러 학사들이여, 그대들은 숨길 것 없이 속에 있는 말을 다하라”고 했다.고려는 건국 때부터 도선국사의 도참설(圖讖說)을 믿어 산천에 제사지내고, 일식이나 월식 같은 ‘천변(天變)’이나 지진이나 해일 같은 ‘지이(地異)’가 있을 삼 불 망(三不忘) - [16] 삼 불 망(三不忘) - [16] 다시 조정은 이제현을 성균악정(成均樂正, 성균관에 두었던 음악 관계의 일을 보는 종4품)으로 불러들였다. 1년 남짓한 짧은 기간이었지만 지방관직을 수행하며 어려운 백성들을 어루만지고 보살핀 선정(善政)이 조정에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제현이 다시 조정의 부름을 받은 까닭은 그가 우탁의 지부상소에 영향을 받아 참 선비의 도리를 실행하려는 ‘지부복궐(持斧伏闕)’의 풍도와 만고의 청백한 선비의 생활을 몸소 실천했기 때문이었다. 서해도 고을 백성들은 조정으로 돌아가는 이제현의 목민관으로서의 덕행을 영세불망비(永世不忘碑)에 새겨 칭송하였다. 삼 불 망(三不忘) - [15] 삼 불 망(三不忘) - [15] “선생님, 앞으로 어떻게 소일하실 계획이옵니까?”“그동안 조정에서 하는 일 없이 녹봉만 축냈지. 고향으로 돌아가서 밀렸던 공부나 하며 후학들을 양성하면서 여생을 보낼 생각이네. 조정에 남은 자들이 종사를 위해 분투해주리라 믿네. 자네는 조정에서 없어서는 아니 될 보배야. 더욱 정진하여 기울어가는 고려 사직을 위해 진충보국(盡忠報國)해주기 바라네.” “선생님, 명심하겠사옵니다. 조정의 일을 하면서 힘들 때에는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도록 하겠사옵니다.” 말을 마친 이제현이 몸을 일으키자 우탁도 따라서 일어섰다. 두 사람은 대문까지 나란히 삼 불 망(三不忘) - [14] 삼 불 망(三不忘) - [14] 충선왕은 할 말을 잊고 부끄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충선왕은 개혁 군주였고 무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윤상을 무너뜨린 자신의 패덕(悖德)한 행위를 극간한 우탁을 징치(懲治)하지는 않았다.《고려사》 열전에는 그때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탁은 경사에 통달하였고, 역학(易學)에 더욱 조예가 깊어 복서(卜筮 : 거북이 껍질, 짐승의 뼈, 대나무 등을 써서 길흉을 판단하는 점법)가 맞지 않음이 없다. 지부상소란 ‘받아들이지 않으려면 머리를 쳐 달라’는 뜻으로 도끼를 지니고 올리는 상소 삼 불 망(三不忘) -[13] 삼 불 망(三不忘) -[13] 그해(1301년) 가을. 제자의 성취를 대견하게 지켜보고 있던 스승 권부는 이제현의 아버지 이진을 만나 제현과 난이 두 사람의 혼사 문제를 협의했다. 혼인 기일은 한가위 추석 명절을 지내고 한 달 후로 쉽게 조정이 되었다.드디어 구월 보름날이 되었다. 결혼식이 성대하게 치러졌고 혼인잔치는 저녁 땅거미가 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제현의 꿈이 이루어진 것이다. 윤혁(尹奕)이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하는 시를 썼다.한 번 잔치에 세 좌주와 함께 즐기니네 술잔 올려 두 집 어른께 축수하네.앞뒤로 양보하며 선관(蟬冠, 고관)들이 옹위하고 남북 삼 불 망(三不忘) - [12] 삼 불 망(三不忘) - [12] 그리운 난이에게.그대에게 괴로운 심정을 호소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소. 그대를 만난 순간부터 내 운명은 결정되었소. 나는 당당하게 그대의 남편이 되고 싶소. 아니 될 수 없다면 그대의 종이라도 될 것이오. 그 길은 등과를 하는 일이라 생각하오. 소년등과(少年登科)가 모든 성공을 보장해 주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라는 것을 스승님께 배웠지만, 나는 일찍 등과를 하고 싶소. 그 이유는 그대 곁으로 하루라도 빨리 가기 위함이오. 그런 까닭으로 내가 꿈을 이룰 때까지 우리의 만남을 중지하는 게 어떨까 하오. 일 년이 걸릴지 이삼 년이 걸릴지 삼 불 망(三不忘) - [11] 삼 불 망(三不忘) - [11] 한편, 이심전심이었을까. 이즈음 난이도 권부학당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이제현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봄날의 아지랑이가 아른아른 피어오르는 어느 날. 난이는 아버지 권부에게 여쭈어보았다.“아버님, 이제현 도령의 학문이 어떠한지요?”애지중지 키워 온 둘째 딸이 애제자에 대해 관심을 보이자 권부는 난이가 벌써 여인으로 성숙했음을 느꼈다. 권부의 목소리는 잔잔했으나 자애로움 속에 무게가 실려 있었다.“난이가 제현이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는 것을 보니 이제 정혼(定婚)을 할 나이가 되었나 보구나.”“아니, 아버님도…….”“부끄러워 할 필 삼 불 망(三不忘) - [10] 삼 불 망(三不忘) - [10] 고려 최고의 직업은 관료고려인들이 꿈꾸던 최고의 직업은 관료가 되는 것이었다. 직업의 종류가 지금처럼 많지 않고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위계가 엄격하던 그 시절에 관료는 당대 최고의 신분층이었으며, 관직에 오른다는 것은 곧 경제적으로 윤택한 생활이 보장된다는 것을 의미했다. 부와 권력과 명예가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당시의 시대상을 이규보(李奎報)는 이렇게 노래했다. 나는 시골에서 쓸쓸히 지내니세파의 곤궁함을 어찌 견디리.목 내밀고 한번 나가고 싶으니부디 도와주시면 얼마나 좋겠소.이제현은 일찍부터 아버지 이진의 영향을 삼 불 망(三不忘) - [9] 삼 불 망(三不忘) - [9] 반 시각 쯤지났을까. 네 소년은 산채에 도착하여 두령이 거처하는 방으로 인도됐다. 두령 만적은 애꾸눈에다가 상처투성이의 험상하고 야만스런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두 손을 뒤로 묶인 채 무릎을 꿇고 있는 소년들을 흥미롭게 쳐다본 후 부하들에게 명령했다. “저 아이들의 눈을 뜨게 해줘라.”소년들은 성거산에 산적들이 출몰한다는 소문을 노인으로부터 들었지만, 막상 산적 두령을 면전에서 마주보자 온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했다. 두령은 짙은 눈썹과 번뜩이는 눈빛에서 뿜어져 나오는 안광이 무서운 인상이었다. 그러나 이제현은 ‘호랑이한테 물려도 삼 불 망(三不忘) - [8] 삼 불 망(三不忘) - [8] 네 소년의 포부와 도원결의간밤에 쏟아진 폭우 탓일까, 아니면 싱그러운 바람 때문일까. 점심 무렵 개경 북쪽 산성리의 천마산과 성거산은 속살을 드러낸 처녀의 몸매처럼 투명해 보였다. 그 사이를 관통하고 내려온 계곡물은 옥 같은 돌 사이로 흘러 박연폭포를 만들었다. 웅장한 폭포는 남쪽의 깎아지른 듯한 벼랑과 사방에 병풍처럼 둘러선 층암절벽에 안기어 절경을 이루고 있었다.박연폭포는 폭포 위에 너럭바위가 바가지 모양으로 패어 이루어진 ‘박연(朴淵)’이라는 연못이 있으며, 폭포 밑에는 폭포수에 의해 파인 연못인 ‘고모담(姑母潭, 지름 40미 삼 불 망(三不忘) - [7] 삼 불 망(三不忘) - [7] 이 당시 원나라는 적자(嫡子)를 두지 못한 성종(成宗, 티무르)의 건강이 좋지 않은 관계로 왕족 간에 왕위쟁탈전을 벌이고 있었다. 충선왕은 연경에서 숙위한 지난 10년 동안 황제의 조카 회령왕(후의 무종) 및 태자 아유르바르와다(후의 인종) 형제와 침식을 같이하면서 주야로 서로 떨어지지 않고 지냈다. 1307년(충렬왕33) 정월 초. 원나라 성종이 죽고, 충선왕은 무종(武宗)을 옹립하는 데 공을 세웠기 때문에 무종이 즉위하자 사태는 오히려 반전되었다. 충선왕의 폐적과 계국대장공주의 개가가 거의 이루어지려던 차에 충선왕은 고려 국왕보 삼 불 망(三不忘) - [6] 삼 불 망(三不忘) - [6] 충선왕, 4년 만에 조비와 해후 정월이 깊어가는 어느 날. 만월대 정원의 앙상한 나뭇가지마다 하얗고 탐스러운 눈꽃이 피었다.눈부시게 펼쳐진 설경에 마음이 들뜬 충선왕은 쉴 새 없이 내리는 함박눈을 맞으며 조비(趙妃)의 처소를 찾았다. 조비는 조인규의 딸로 세자빈이었으나, 충선왕이 원나라 공주와 결혼하면서 두 번째 부인으로 밀려나 있었다. 방안에는 향내가 그윽하였는데 문득 벽에 걸린 《시경(詩經)》의 한 구절이 시선에 들어왔다.하루 동안 못 보아도 석 달을 못 만난 듯하네.(一日不見 如三月兮 일일불견 여삼월혜)충선왕은 낭군이 돌아오기 삼 불 망(三不忘) - [5] 삼 불 망(三不忘) - [5] 고려의 백성들은 만감이 교차하는 심정으로 이 슬픈 광경을 목도하고 있었다. 원나라에 소환되는 충선왕과 다시 왕위에 오르는 충렬왕은 권력교체의 비정한 장면을 연출했다. ‘권력은 부자지간에도 나눌 수 없다’는 이야기가 고려의 현실로 실현되는 순간이었다.“아아, 충선왕이 대체 무슨 죄를 지었기에 원나라로 압송된다는 말인가!”“원나라의 횡포가 하늘을 찌르는구나!” “도대체 원나라가 무엇인데 고려 왕을 제 마음대로 바꾼단 말인가!”운집한 군중들 사이에서는 관원들의 눈을 피해 들릴까 말까 하는 볼멘소리가 간간히 흘러나왔다. 그것은 원나라의 전 삼 불 망(三不忘) - [4] 삼 불 망(三不忘) - [4] 그해 10월. 연경에 홀로 남아있던 제국대장공주(齊國大長公主, 장목황후)가 남편을 찾아 고려로 왔다. 충렬왕은 멀리 국경 부근인 서북면 평원군까지 가서 공주를 영접하였다. 왕족들과 평장사 유천우, 지추밀원사 장일, 지주사 이분희, 승선 최문본, 박항, 상장군 박성대 등이 호종(扈從)했다. 충렬왕은 자신의 부인이지만 원나라 공주를 영접하면서 형언할 수 없는 착잡함과 긴장감을 느꼈다. 공주의 일행이 들어서자 충렬왕은 공주에게 다가가 몽골식으로 손을 잡고 읍했다.“공주, 그동안 무척 보고 싶었소이다.”“전하, 오랫동안 뵙지 못해 죄송하나 처음처음이전이전12345끝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