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24건) 리스트형 웹진형 타일형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24] 혜화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1편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24] 혜화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1편 이번 탐방기의 계획은 혜화동 JCC아트센터에서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 혜화문, 성북동의 시인 겸 사상가 조지훈의 옛집터, 동선동 시인 신동엽 옛집터, 돈암동 미아리고개까지 구간이었다. 그러나 그동안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혜화문길’의 의미와 조지훈에 대한 소개를 중심으로 하다 보니 예상치 않게 분량이 많아졌다, 또 이 구간에 대해 답사 전에 제대로 확인하지 못해 중요한 몇 곳을 놓쳤다. 그런 까닭에 이번 탐방기는 한양도성 혜화동 전시안내센터에서 음악가 채동선 옛집터까지 한정한다. 이 구간 일부는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23]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3편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23]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3편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는 3편으로 계획했었다. 1편은 동대문역에서 연건동 1925년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간행된 ‘매문사 터’까지, 2편은 서울대 병원부터 혜화동로터리까지, 3편은 혜화동로터리에서 성북동, 미아리고개까지였다. 그런데 몇몇 장소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한 경우도 있었고, 또 일부의 경우는 가볍게 넘기기에는 부끄러웠다. 특히 지난 2편에서 소개한 김상옥 의사에 대한 것은 그의 삶을 안 순간 가볍게 넘길 수 없었기에 2편의 중심이 되었다. 그 과정에서 최최의 2편에 소개해야 할 부분이 많이 누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22]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2편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22]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2편 동대문역에서 미아리고개까지 길을 이어 걷는다. 1편에서는 동대문역에서 김수영 시인 집터, 여진족이 머무는 북평관, 남이장군과 북학파 실학자 박제가의 집터, 김소월의 시집 『진달래꽃』을 출판한 매문사 터까지였다. 지난주 답사를 보완하기 위해 1편 구간을 2차례에 걸쳐 다시 다녀왔다. 2편 구간은 1편 답사 당시 몰라서 넘어갔던 곳들을 재확인한 내용을 포함해 동대문역에서 혜화동로터리까지이다. 여러 중요한 장소들이 많다. 그러나 이번 2편에서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간담을 떨어뜨린 김상옥 의사(金相玉 義士,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21]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1편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21] 동대문에서 미아리고개까지: 1편 동대문역에서 종로구 일대와 성북구 미아리고개까지 길을 걷는다. 조선 시대의 역사 현장과 근현대 인물의 흔적을 찾아간다. 관련된 큰길은 종로, 율곡로, 김상옥로, 대학로, 이화장길, 창경궁로, 동소문로 등이다. 이 구간은 3편에 걸쳐 소개한다. 1편은 동대문역에서 연건동 1925년 김소월의 『진달래꽃』이 간행된 ‘매문사 터’까지다. 전체 거리는 2시간 정도 소요된다. 2편부터는 서울대 병원부터 혜화동로터리까지, 3편은 혜화동로터리에서 성북동, 미아리고개까지이다. 출발지는 지하철 1‧4호선 동대문역 10번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19] 호랑이 기세 전설을 지닌 산: 금천구 2편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19] 호랑이 기세 전설을 지닌 산: 금천구 2편 금천 시흥동 일대를 1편에 이어 걷는다. 한우물에서 ‘시흥향교 터’까지다. 한우물 위에 있는 건물지와 제2우물지 근처에서는 등산객이 붐빈다. 또 곳곳의 평평한 바위에는 등산객들이 휴식하고 있다. 삼성산과 관악산 정상이 보이는 곳 역시 마찬가지다. 조용히 쉴만한 바위를 찾았다. 건물지에서 남쪽으로 80여 미터를 가면 헬기장이 있고, 헬기장을 지나면 돌출한 바위 하나가 있다.바위에 새겨진 글자와 알 수 없는 구멍들 그 바위에 잠시 쉬려다 보니, ‘崔仙(최선)’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최씨 성을 갖은 사람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⑲] 서울 하늘 아래 가장 높고 오래된 우물 : 금천구 1편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⑲] 서울 하늘 아래 가장 높고 오래된 우물 : 금천구 1편 지금은 서울시에 포함되어 있으나 예전에는 경기도에 속했던 곳들도 서울에는 많다. 대개는 서울이 확대되면서 서울 경계 경기도 지역이 서울에 편입된 결과이다. 이번 탐방지는 금천구이다. 과거에는 일부는 경기도에 속했고, 일부는 서울시 구로구에 속했던 곳이다. 금천구에도 많은 유적이 있으나 자료조사 과정에서 가장 눈에 띈 곳은 호암산 꼭대기나 다름없는 위치에 있는 ‘한우물’이다. 대개의 산에는 절이 있고, 절이 있으면 우물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한우물’을 산 위에 있는 절의 우물이나 산 중턱 등에 있는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⑱] 용산, 우리 땅이나 우리 땅이 아녔던 곳 2편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⑱] 용산, 우리 땅이나 우리 땅이 아녔던 곳 2편 원효로 3가 목월공원(木月公園)을 출발점으로 용산을 이어 걷는다. 이 코스는 옛사람들의 염원 공간이고, 근현대인들의 삶과 죽음의 공간들이다. 그 길을 걷노라면 그 자체가 오르막과 내리막이 번갈아 놓여있는 삶을 걷는 듯하다. 작은 언덕길을 지나면 평지가 있고, 또 배를 타지 않고는 건너기 막막한 큰 강이 곁에서 손짓하기도 한다. 찬바람에 실려 걷는 강변옆에는 근대 문명의 상징과도 같은 철길이 무겁게 첨단 도시와 1960년대에 머문 듯한 공간을 나누고 있기도 하다. 도심으로 들어오면 남산 자락 언덕이 굽이친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⑰] 용산, 우리 땅이나 우리 땅이 아녔던 곳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⑰] 용산, 우리 땅이나 우리 땅이 아녔던 곳 서울 한가운데 용산을 걷는다. 용산(龍山)의 유래에 대해서는 『증보문헌비고』에서는 백제 기루왕 때 한강에서 용 두 마리가 나타났기에 용산, 산 형세가 용 모습을 닮아 용산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또한 절두산 잠두봉을 용두봉이라고도 했는데, 용산이 용 꼬리 부분에 해당되어 용산이라고 했다는 설도 있다(『다큐멘터리 서울정도육백년』, 제3권, 이경재, 서울신문사, 1993년). 어떤 주장이든 모두 ‘용’에 의해 생겨난 이름이다. 고려 때에도 용산이란 지명이 언급되고 있어 오랜 역사가 있음을 확인케 해 준다.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⑯-] 근현대의 현장, 정동길을 걷다 2편 : 한(恨)의 길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⑯-] 근현대의 현장, 정동길을 걷다 2편 : 한(恨)의 길 정동길을 이어 걷는다. 사람들은 「광화문연가」나, 덕수궁, 근현대사 역사 현장, 서양인의 공간, 기독교의 공간으로 알고 있다. 시계를 거꾸로 돌려 620여 년 전으로 돌아가면 전혀 다른 공간이다. 조선 창업가 태조(太祖) 이성계(1335~1408, 재위 1392~1398)와 그의 계비(繼妃, 둘째 부인) 신덕왕후(神德王后) 강씨(1356~1396)의 성공과 좌절, 수백 년 된 피눈물과 한(恨)이 서려 있는 곳이다. 또 다른 창업(대한제국)과 멸망도 그 좁은 공간에 있다. 1397년에 만들어진 도성(都城)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⑮] 근현대의 현장, 정동길을 걷다 1편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⑮] 근현대의 현장, 정동길을 걷다 1편 누구나 한번은 들어봤을 덕수궁 돌담길에 관한 노래들이 있다. 연인들의 데이트 코스로 주목받던 시대의 산물이다. “이제 모두 세월 따라 흔적도 없이 변해 갔지만 덕수궁 돌담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에 아직 남아 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이영훈 작사·작곡, 최현주·이문세·이수영 노래, 「광화문연가」) “덕수궁의 돌담길 옛날의 돌담길. 너와 나와 처음 만난 아카시아 피던 길. 정동교회 종소리 은은하게 울리면은 가슴이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⑭] 현대의 철인(哲人) 탄허 대사와 조선의 건설자 태종과 정도전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⑭] 현대의 철인(哲人) 탄허 대사와 조선의 건설자 태종과 정도전 가장 번화하고 땅값이 비싼 신도시 강남구와 서초구에도 뜻밖의 역사 유적이 있다. 한 번은 꼭 가봐야 할 곳이다. 우리 시대 최고의 고승이며 학자, 예언가였던 탄허(呑虛) 대사(1913~1983), 조선을 실질적으로 건국한 주인공들인 태종(太宗, 1367~1422)과 그의 정적(政敵) 삼봉 정도전(鄭道傳, 1342~1398)의 자취가 있는 곳이다. 지하철 3호선과 수인분당선이 만나는 수서역이 출발점이다. 6번 출구 성남, 분당, 세곡동 방면으로 나오면 5미터 앞 큰 길가에 ‘서울둘레길(양재시민의숲) 10.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⑬] 소명의 사람들과 난민의 안식처 : 마포 양화진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⑬] 소명의 사람들과 난민의 안식처 : 마포 양화진 삶은 다양하다. 사는 이유도, 살아가는 방법도 제각각이다. 마포구 양화진에는 여러 종류의 삶 가운데 특히 소명에 따라 산 사람들, 믿음의 사람들의 안식처가 있다. 또 자신의 신념이나 존재 조건의 차이로 유랑자가 되어 우리 땅에 묻힌 사람들도 있다. 양화진외국인선교사묘원과 천주교의 절두산 순교성지가 그곳이다. 그들의 삶을 찾아가 봤다. 서울지하철 2호선과 6호선이 함께 있는 합정역 8번 출구가 출발지이다. 지하철역에서 내려 8번 출구를 향해 가다 보면 교보문고 합정점이 있다. 한가한 시간을 이용해 답사하는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⑫] 의성(醫聖) 허준에게 코로나 시대를 묻다 : 강서구 편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⑫] 의성(醫聖) 허준에게 코로나 시대를 묻다 : 강서구 편 한동안 잠잠했던 코로나가 다시 극성이다. 조선시대 명의(名醫) 중 명의, 의성(醫聖)이라고 불리는 허준(許浚, 1537∼1615)을 찾아간다. 이번 답사길은 지하철 9호선 가양역에서 시작한다. 1번 출구로 나오면, 입구 좌측에 ‘하루방’이 두 개 서 있다. 수도권에서 하루방은 대개 음식점 장식물이다. 그러나 이 하루방은 서울에 유학 온 제주 출신 학생들을 위한 ‘제주탐라영재관’을 알리는 상징물이다. 영재관 바로 앞부터 허준 동네를 알리는 ‘허준테마거리시작점’ 표지판이 보인다. 50미터 직진해 횡단보도를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⑪] 잃어버린 한성백제 왕도를 찾아서 : 풍납토성․몽촌토성, 석촌동․방이동고분군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⑪] 잃어버린 한성백제 왕도를 찾아서 : 풍납토성․몽촌토성, 석촌동․방이동고분군 ‘서울의 폼페이’라고 홍보되는 곳이 있다. 송파구 풍납동 일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 방이동과 석촌동 고분군 일대이다. 백제 678년 역사 중 493년 역사, 시조 온조부터 의자왕까지 31명 왕 중 21명(온조~개로왕)의 ‘한성(漢城)백제’ 왕도(王都), 하남위례성이 있던 곳이다. 이후 천도한 웅진(공주, 63년)과 사비(부여, 122년)와 달리 흔적조차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이 남긴 역사책도 1천 년 전에 사라졌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일부만이 부실하게 기록되어 있다. 몇몇 일부 중국 역사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⑩] 서울中 서울 : 북촌 시리즈 2 – 개화, 갑신정변, 망국, 3․1운동의 공간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⑩] 서울中 서울 : 북촌 시리즈 2 – 개화, 갑신정변, 망국, 3․1운동의 공간 북촌은 넓고 아주 깊다. 가벼운 산책을 겸한 역사 인물 흔적과 현장을 찾아가는 북촌 두 번째 구간 답사를 시작한다. 공간적으로는 안국역 북쪽으로 대종교 중광터까지. 서쪽으로는 정독도서관과 안국동 사거리까지. 안국역 남쪽으로는 인사동, 조계사에서 종각역까지다.주요 코스는 다음과 같다. 안국역 2번 출구 -> 대종교 중광터 -> 가회동성당 -> 일제강점기 탁구 챔피언 차덕화 생가터 -> 손병희 집터 -> 재동초등학교 -> 헌법재판소(박지원․박규수․이준경 집터,이상재․최린 집터, 제중원 터, 창덕여자고등학교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⑨] 서울中 서울 : 북촌 시리즈 1 - 3․1운동, 건국준비위원회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⑨] 서울中 서울 : 북촌 시리즈 1 - 3․1운동, 건국준비위원회 북촌. 서울의 여느 곳이 다 그렇듯 아는 만큼 보여주는 곳이다. 조선 시대 북촌은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에 따르면, 지금의 종각 북쪽 지역을 지칭하고, 당시 주류였던 노론 양반, 고위 관료들의 거주지였다. ‘서울 중의 서울’이라고 평가되는 곳이다. 과거의 잔영이 여전히 많이 남아 겉보기로는 조선 시대 양반들의 삶을 느낄 수 있는 한옥이 즐비한 공간이다.북촌 답사를 시작하며코로나 이전에는 우리나라 사람들과 외국인이 어깨를 부딪칠 만큼 붐볐다. 이번에 찾은 북촌에는 코로나에 지친 젊은 연인들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⑧] 도봉구 투쟁과 은둔 : 독립, 자유․민주․민초(民草)시대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⑧] 도봉구 투쟁과 은둔 : 독립, 자유․민주․민초(民草)시대 어지러운 세상에서 선비가 살아가는 방법에는 대개 세 가지 방식이 있다고 한다. 세상과 권력에 타협하고 굴종하며 자신의 이익을 취하는 것, 불의한 세상에 저항하고 싸우는 것, 숨어서 인내하며 때를 기다리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의 지식인을 보아도 똑같다.우리는 보통 우리 땅에 남아 적극적으로 친일했거나 변절한 사람들을 무자비할 정도로 비판한다.또 망명해 해외에서 활동한 독립운동가들은 지극히 높인다. 그러나 그 사이에 있던 사람들은 잊거나 외면하곤 한다. 물론 그 세 종류의 사람에 대해서도 현재의 자신의 이념이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⑦] 초안산, 대한민국 유일 500년 사람들의 안식처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⑦] 초안산, 대한민국 유일 500년 사람들의 안식처 『사기(史記)』는 고대 중국 역사가 사마천(司馬遷)이 저술한 중국 역사책이다. 특히 「열전」 부분은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병법(兵法), 리더십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은 한 번쯤 읽었거나 들어본 책일 듯하다. 『손자병법』의 손자, 『오자병법』의 오자, 『사마법』의 사마양저, 노자, 한비자, 맹자, 한신 등 지금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는 인물의 삶을 생생히 기록했다. 또 그 안에는 역사 논쟁을 초래하는 고조선에 대한 기록도 있다.사마천은 흉노족과 전투 중 항복한 명장 이릉을 적극 변호했다. 한 무제는 사마천에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⑥] 의주로 위의 시인 정지용, 비운의 여인 장희빈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⑥] 의주로 위의 시인 정지용, 비운의 여인 장희빈 의주로(義州路). 조선 시대 서울∼고양∼파주∼개성∼평양∼의주까지 연결된 도로이다. 중국과의 육로 교류 통로였다. 임진왜란 때는 선조가 피난 갔다가 서울 수복 후 되돌아왔던 길이다. 또 자기 땅이 전쟁터가 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명나라에서 군대를 파견해 조선에 들어온 길이다. 조․명 연합군에 의해 평양성에서 패배한 일본군이 서울로 도망쳤던 길이다. 숙종의 여인이었던 장희빈(張禧嬪, 1659~1701), 납북된 시인 정지용(鄭芝溶, 1902~1950)의 사연이 실린 길이기도 하다. 현재 서울 중구 의주로 1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⑤] 서촌, 잊혀진 행주대첩 영웅 '도원수 권율' [박종평 기자의 2000년 수도 서울 탐방기-⑤] 서촌, 잊혀진 행주대첩 영웅 '도원수 권율' “알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진짜를 보게 된다. 보게 되면 소장하게 되나, 헛되이 소장하는 것은 아니다(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서울 길을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유한준(1732~1811)의 말이다. 비록 무생물이나 서울을 알게 되면 서울은 생명체인 것처럼 언 듯 언 듯 감춰진 속살을 드러낸다. 사랑이 깊어갈수록 서울은 시대마다 겹겹이 껴입은 옷들을 한 꺼풀 한 꺼풀 벗는다. 시간이 갈수록 쌓여가는 사람 무늬, 공간의 변화 속에서 진짜 서울을 찾노라면 감탄과 탄식이 처음처음12다음다음끝끝